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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9. 대구 여행 만두 맛집 중식 맛집 영생덕
    마늘의 국내 맛집탐방 2023. 2. 2.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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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 여행 만두 맛집 중식 맛집 영생덕 

     

     

     

     

     

     

     

     

     

    대구 여행 만두 맛집 중식 맛집 영생덕
    대구 여행 만두 맛집 중식 맛집 영생덕

     

     

     

     

     

     

     

     

     

     

     

     

     

     

     

     

     

     

    대구 여행 만두 맛집 중식 맛집 영생덕
    대구 여행 만두 맛집 중식 맛집 영생덕

     

     

     

     

     

     

     

     

     

     

     

    양파
    양파

     

     

     

     

     

     

     

     

     

     

     

     

    만두
    만두

     

     

     

     

     

     

     

     

     

     

     

    만두
    만두

     

     

     

     

     

     

     

     

     

     

     

     

    짬뽕
    짬뽕

     

     

     

     

     


    영생덕(永生德) 은 40년전통을 자랑하는 대구 맛집이다. 영생덕은 화교가 운영하는 음식점이다. 간판부터 엄청난 내공을 뿜는 중국식 만두 전문점 영생덕은 만두외에도 기본적인 중식을 판매하고 있다. 40년 이상 내공을 쌓은 노포답게 큰 어항이 있는 실내 등 인테리어가 고풍스럽다. 물만두, 고기만두, 찐교스, 꾼만두 등이 많이 팔린다. 메뉴판에 계란빵과 호떡이 있는데 지금은 팔지 않는다. 일반적인 중국집 메뉴들도 유명하다.영생덕의 만두는 바삭쫄깃한 피와 적당한 만두소의 조화가 훌륭하다. 보통 접시당 10개가 나온다. 도톰한 피의 물만두는 생강의 맛이 좋다. 전분 섞인 얇은 피를 자랑하는 찐교스는 이 곳의 인기메뉴. 

     

    잠시 기가를 살펴보면,
    '영생덕'을 비롯해서, '복해반점' '군방각' 등 대구의 종로지역에는 화교, 즉 중국인들이 경영하는 식당이 모여 있다. 화교 상가가 대구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대략 1905년 무렵이었다. 많은 부분 한국과 중국의 관계는 일본과 연관되어 진행될 때가 많았다. 중국은 1931년 일본의 만주침략으로 대륙의 상당 부분을 잃고 마침내 중일전쟁에 들어갔는가 하면,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 36년의 기간을 보냈다. 일본의 침략이라는 공통의 경험이 과연 조선과 중국을 깊은 유대감으로 묶어주었는가 하면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었다. 1931년 조선에서 100여 명이 넘는 중국인이 학살당한 '피의 학살극'이 그 단적인 예이다.
    만보산 사건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중국 장춘의 북방에 위치한 만보산에서 조선인 소작농과 중국인 농민의 분규가 일본, 중국 경찰의 발포로까지 이어진 사건을 의미한다. 별다른 인명 피해 없이 일단락된 이 사건은 언론의 오보(誤報)로 조선 내부에서 100명의 중국인이 학살당하는 대규모의 반중(反中) 폭동을 불러일으켰다. 학살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광분한 중국인들이 조선인의 주된 이주지역이었던 만주지방을 중심으로 잔인한 조선인 보복 학살극을 자행한 것이었다. '청소'라고 표현된 이 학살극으로 인해 어떤 마을의 경우 100명에 이르는 거주 조선인 전원이 중국인들 손에 몰살당하기도 했다.
    이 어이없는 학살극의 배후에는 중국 대륙으로 진출하려는 일본과 이를 막으려는 중국의 필사적인 저지 노력이 있었다. 가난 때문에 중국으로 이주해간 조선인은 논농사에 뛰어난 기술을 지니고 있는데다 근면해서 중국인 지주들의 선호를 받았다. 그러나 중국의 입장에서 볼 때, 그들 조선인들은 일본 국적을 가진 일본인이었으므로 그들의 대륙 진출은 일본인의 대륙 진출에 다름 아니었다. 일본과 중국, 그 치열한 신경전 사이에 무력하고, 가난한 조선인 이주민들이 서 있었던 것이다. 김동인의 '붉은산'(1933)은 중국 이주 조선인 농민들의 비극적 삶에 관한 이야기이다.
    소설은 만주의 한 조선인 마을을 배경으로 가혹한 중국인 지주와 혹사당하는 조선인 소작농 간의 대립을 다루고 있다. '만보산 사건' 직후 발표된 만큼 중국인에 대한 깊은 적개심이 소설 전면을 채우고 있다. 문제는 중국인과 조선인 간 갈등의 핵심이자, 갈등의 원인이었던 일제의 존재를 김동인이 간과한 채 모든 책임을 중국인들에게 미루고 있었다는 점이다. 동시기 일본의 작가도 파악하고 있던 그 사실을 왜 식민지 작가 김동인은 감지하지 못했던 것일까. 그것은 작가적 역량의 차이에서 비롯된 문제는 아니었다. 평양 부호의 아들로 태어나 기생과의 풍류로 대변되는 전통적 조선 세계에 젖어 있던 김동인에게 역사와의 대응은 애초부터 무리였던 것이다. 적어도 역사와의 대응이란 미래로 향하려는 사람들의 몫이지, 과거의 향수에 젖어 있는 사람들의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가 대구관련 중식집 정보.

     

    만두에 대해 좀 더 살펴보면,

    밀가루 피에 고기로 만든 소를 채워 넣은 음식. 중국에서 기원한 것으로 알려져, 세계적으로 인기를 이어가는 보편식. 우리나라에서만 유독 ‘그것’을 총칭해 만두라 부른다. 중국에서 만터우(饅頭)는 소를 넣지 않은 밀가루 빵을 이른다. 반찬과 함께 먹는 밥 또는 식빵 개념이다.
    우리가 아는 만두는 바오즈(包子), 또는 가오즈(餃子)라 부른다. 샤오마이(燒賣)나 샤오룽바오(小籠包) 등으로 칭하는 것도 있다. 일본에서도 교자, 슈마이 등으로 나눠 부르지 총칭해서 만두라 하진 않는다. 영어로는 덤플링(dumpling)이 보편적이지만, 튀긴 만두의 경우 팟 스티커(pot-stickers)라고도 부른다.
    만두의 기원이야 제갈량의 남만(南蠻) 정벌 고사가 널리 알려졌다. 하지만 이전에도 만두와 비슷한 음식이 있었을 것이란 학설이 유력하다. 어차피 만두는 빵의 종류다. (고기로 만든) 소가 들었고 안 들었고의 차이다.
    따지고 보면 만두나 사모사(samosa), 미트파이는 모두 같은 맥락이다. 사모사는 고기와 채소를 다져 간을 하고 밀가루 반죽 피 속에 넣고 튀겨낸 음식. 인도 요리로 분류되긴 하지만 중동과 서남아시아 지방 대부분 국가에서 만들어 먹는다. 내용물과 맛은 조금씩 다르지만 삼사(터키), 삼부사(이란), 산부삭(아랍) 등 비슷한 음식을 비슷한 이름으로 부르며 먹는다. 우즈베키스탄이나 중국 신장(新疆)위구르 자치구 등에선 빵 속에 양고기를 조려 넣는 만두와 유사한 ‘고기 빵’이 거의 주식이나 다름없다. 러시아 서부에도 피로시키나 사므사, 펠메니로 불리는 고기만두가 있다. 터키 만트는 이름까지 닮았다. 이탈리아의 라비올리(ravioli)도 소가 적게 든 대구의 납작만두와 유사하다. 정작 이탈리아 사람들은 라비올리를 만두가 아닌 국수로 여기지만 말이다.
    영국과 호주, 뉴질랜드 등 영국문화권에서 즐기는 미트파이 역시 원리상 만두 종류다. 고기를 다져 양념한 후 빵 반죽에 넣고 구워낸 것이 미트파이다.
    만두는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지만, 먹을 때는 편하다. 탄수화물과 단백질, 채소류를 한 번에 섭취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샌드위치, 햄버거와 다를 게 없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마카오에서 주파바오(돼지갈비를 끼운 빵)를 ‘개방된 만두’(open dumpling)라 여기는데, 여기서 서구인들의 만두에 대한 생각을 알 수 있다.
    누구에게나 맛있고 균형 잡힌 영양가 덕분에 만두는 세계 곳곳에서 각각 두루 발전했다. 한국도 편수, 꿩만두 등 만두 문화가 발달하며 식문화로 자리 잡았다. 우리나라 냉동 만두는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몇 년 전부터 미국 내 만두 판매 1위는 당연히 한국 업체의 몫이다.
    개성지방의 명물인 편수는 일반적 만두인 교자(餃子)나 포자(包子)의 형태가 아니다. 오히려 인도 만두인 사모사와 닮았다. 옆에서 보면 피라미드 모양 사각뿔이고 위에서 보면 네모지다. 두부와 숙주나물, 고기뿐 아니라 굴과 잣, 버섯 등 다양한 재료가 들어간다. 고기도 소고기에 꿩, 돼지고기 등 다양한 부위를 섞어서 쓴다. 주로 만둣국으로 먹는데 보통은 차게 먹는다. 편수는 중국에서 건너왔다. 문헌에 네모난 물만두 형태를 편수, 또는 편식이라 불렀다는 기록이 나온다. 중국에 삼을 팔러 갔던 송상들이 전해온 것이라는 설이 우세하다. 어쨌든 찬 국물에 말아 먹는 게 남쪽 사람 입맛에는 잘 맞지 않았는지 편수의 유행은 남한으로 내려오진 않고 북쪽으로 올라갔다. 
    우리나라 만두 문화에서 특징 중 하나가 꿩을 쓰는 것이다. 특히 강원도와 충북도 일원에선 겨울에 잡은 꿩을 통째로 맷돌에 갈아 만두소로 쓴 ‘꿩만두’가 별미 음식이었다. 대개 만두피는 구하기 어려운 밀가루 대신 메밀을 썼다. 뼈째 갈았기 때문에 다소 버석거리긴 해도 진한 꿩고기 맛을 한입에 즐길 수 있다. 꿩만두는 생치만두(生雉饅頭)라 해 지금도 파는 집이 강원 원주와 평창 쪽에 더러 있는데, 꿩의 수급 문제와 생소한 식재료를 꺼리는 소비자들 탓에 그리 인기를 얻진 못하고 있다.
    한국 만두의 또 다른 특징이 김치다. 무엇이든 김치만 넣으면 무난한 음식이 되는데 굳이 만두라고 김칫소를 안 넣을 이유는 없다. 당면을 넣어 만두소의 양을 불리고, 두부와 숙주가 고기 맛을 보충하지만 김치의 강력한 풍미를 대신할 수는 없다. 이제 김치만두는 ‘짜장이냐 짬뽕이냐’처럼 만두를 선택할 때 한국인의 뉴노멀 기준 중 하나가 됐다.
    우리 만두는 엄청난 크기도 특징 중 하나다. 어른 주먹만 한 ‘이북식 만두’는 크기에서 주는 시각적 포만감이 실로 대단하다. 당연히 수저로 터뜨려 먹는다. 한식의 대부분 요리가 소찬(小餐) 위주지만 만두만큼은 아주 크다.
    만두는 일상식이나 간식에도 빠지지 않는다. 아예 떡볶이에 넣어 먹을 요량으로 튀긴 만두를 따로 만들 정도다. 일부러 딱딱한 만두를 빚고 튀겨내 떡볶이 국물에 푹 적셔 먹도록 했다. 떡볶이 전용 만두라니! 창의적이기 이를 데 없지 않은가.
    대구에선 전처럼 부친 납작만두를 즐긴다. 납작만두는 만두라 하기엔 민망할 정도로 소가 적지만, 전이라고 생각하면 그나마 감지덕지인 형태를 취하고 있다. 얇은 두 겹의 만두피 사이에 갈아낸 듯 약간의 채소와 당면이 남아 ‘만두의 혈통’임을 주장한다. 라비올리 스타일과 다름없다. 기름에 부쳐 매콤달콤한 쫄면이나 양배추를 싸먹으면 그 맛이 꽤 훌륭하다.
    만두가 흔해지면서, 한국에선 만두가 고급 요리의 반열에 오르진 못했다. 명절에나 맛볼 수 있던 진귀한 음식이, 라면 따위에 들어가고 군부대 PX나 편의점 마이크로웨이브 기기에서 빙글빙글 익어가는 값싼 대중음식이 될 것을, 상상조차 못했을 것이다. 
    일본에는 자생적 만두가 없다. 오랜 시간 육식을 금한 까닭이다. 대신 중국 만두를 본떠 팥소 등을 넣은 찐빵(あんまん) 비슷한 음식이 생겨났다. 고기소가 들어있지 않은 까닭에 우린 그걸 만두라 부를 수는 없다. 뒤늦게 먹기 시작했지만 일본인들은 만두를 좋아해 반찬처럼 상식한다. 집에서 교자만두를 구워 밥과 함께 먹기도 한다. 슈퍼에는 만두 전용 간장이 다양하게 출시돼 있을 정도다. 특히 라멘과 야키교자는 찰떡궁합처럼 여긴다. 일본에서는 교자 외에 포자만두를 주카망(中華まん)이라 해 호빵처럼 곳곳에서 판다. 딤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슈마이도 즐겨 먹는다.
    일반적인 만두는 중국인이 가장 잘한다. 볶음밥처럼 종주국 솜씨에 결코 따라갈 수 없는 메뉴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만두다. 모든 재료는 만두가 될 수 있고 또 그 맛을 따라잡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요즘 같은 계절에는 삼치를 사다 어만두를 만든다. 만두에도 제철이 있다.
    중국에는 국수와 밥, 요리를 파는 식당이 있고, 아예 만두만 파는 만두집이 따로 있는데,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무슨 규범처럼 철저히 지켜진다. 만두와 요리를 함께 파는 경우는 대형식당이거나 관광객을 받는 관광식당이다. 만두집에서 밥 메뉴를 팔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만두가 바로 밥이기 때문. 간편하면서도 필수 영양소는 모두 채울 수 있고 열량 또한 그럭저럭 충분하다. 특히나 피가 두껍고 폭신한 바오즈는 정말 밥처럼 느껴진다.
    중국의 만두는 현지인들도 놀랄 만큼 다양하다. 밀가루 반죽이 아닌 것으로 만두를 빚는 경우도 있다. 채소 이파리나 생선살, 생선껍질, 닭껍질, 닭날개, 계란 부침, 불린 해삼 등을 쓴다. 배춧잎으로 말아낸 만두는 따로 숭채만두라 한다. 둘둘 말아내기만 한다고 만두가 되지는 않는다. 사방이 막혀 있어야 비로소 만두라는 명칭을 얻을 수 있다. 아무리 유사한 소가 들었대도, 전병이나 춘권이라 따로 부르지 만두라 하지 않는다.
    중국 수교자(水餃子)는 이름 뜻 그대로 우리가 아는 물만두다. 다만 중국인들은 두껍고 넉넉한 피가 펄럭이는 만두를 수제비처럼 먹는다는 것이 우리와 다른 점이다(한국에서 물만두란 간식이나 보너스 음식으로 취급받는다).
    크기가 작은 만두는 양은 적은 대신 강렬한 특색이 있어 사랑받고 있다. 새우나 채소를 넣고 쪄내 한입 크기로 맛볼 수 있는 샤오마이는 미식 천국인 홍콩에서도 별미로 손꼽힌다. 작은 바구니(小籠)에 쪄낸다고 해서 붙은 이름인 샤오룽바오(흔히들 소룡포라 잘못 알고 있는데 룡(龍)이 아니라 롱(籠)이다)는 수많은 만두 종류에서도 가장 정체성이 확실하다. 최근에는 ‘만두의 기본이자 딤섬의 시작’으로 알려지면서 인기를 얻고 있다. 냉장과 조리 온도 차를 이용해 육즙을 가둬 촉촉하고 진한 맛을 느낄 수 있다.
    여러 이유로 한국에서 중국식 만두는 그 만드는 공에 비해 어처구니없이 저렴하게 팔린다. 짜장면 서너 그릇에 당연히 ‘군만두 서비스’를 기대한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올드보이’의 오대수(최민식 분)는 15년간 좁은 방에 갇혀 군만두를 주식으로 먹었지만, 사실 그 군만두는 박철웅(오달수 분)이 부하들과 시켜먹은 짜장면에 따라온 ‘보너스’였을 뿐이었다.
    본래 화교 사회에서 만두란 공장에서 떼오는 게 아니라 일일이 직접 빚어 만드는 것이기에 서비스로 줄 만큼 값싼 만두는 없다. 몇 년 전부터 만두를 잘 빚기로 소문난 몇몇 화상(華商) 중국요리점이 만두 마니아의 입소문을 타고 기나긴 줄을 세우며 인기를 끌고 있다. 직접 빚은 군만두나 찐만두, 부추합 등은 기존 공장 만두(?)와는 확연히 다르다. 솜씨 훌륭한 만두집 덕에 조연이었던 만두가, 이제야 당당한 주연으로 제값을 받는 분위기가 만들어진 것이다.

    놀고먹기연구소장 이우석 소장의 글을 참고했다.


    다시 또 다른 뉴스기사,
    대구·경북지역 중화요리의 역사는 대구에 화교가 정착하기 시작한 1905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화교 상인(화상) 1·2호가 경부선 개통을 계기로 조선 3대 시장의 하나인 대구에 정착했는데 1910년대 들어 화교 인구가 급속히 증가해 1919년에는 48호 165명이 거주했다.
    대구경찰서가 1923년 말 조사한 바에 따르면 대구의 중화요리점은 2호, 음식점은 4호, 만두·호떡집은 29호로 총 35호에 달했다. 중화요리점은 일제강점기에 비교적 규모가 컸으며 주로 합자조직으로 창업해 중국에서 요리사를 데려와 전통 중국 요리를 하는 식당이었다. 중화요리점보다는 소규모이며 일반 서민을 위한 중화요리를 제공하는 것이 중화음식점이었다.
    음식점보다 영세한 규모의 만두·호떡집은 만두(군만두, 물만두)뿐 아니라 더우장(豆醬), 여우티아오(油條), 계란빵, 팥빵, 식빵, 공갈빵 등을 제조 판매하고 중국의 명절 때 먹는 원소절의 찹쌀떡탕(湯圓), 단오절의 쫑즈 등도 만들어 파는 곳이었다.
    1923년 말 대구의 중화요리점은 경정(현 종로)에 위치한 유명화와 왕수산이 경영하는 요리점이었다. 호떡·만두집으로 가장 유명한 곳은 종로의 연승관(連陞館)이었다. 1920년대 후반 대구의 주요한 식당은 군방각(群芳閣), 인성루(仁盛樓) 등이었으며 상주에도 홍성관(鴻盛館)과 같은 음식점이 있는 것으로 봐서 경북의 군 단위까지 중화요리가 확산된 것으로 보인다. 1930년 대구·경북의 중화요리식당은 66개소, 요리사는 109명에 달했다.
    지역 최대의 중화요리점은 군방각으로 1920년대 영업을 시작해 1960년대 말 문을 닫기까지 약 40년간 영업을 했다. 종로 화교소학교 맞은편에 위치했던 군방각은 요리사를 포함해 직원이 총 20명에 달할 정도로 규모가 매우 컸으며 지역 유지의 모임이나 결혼식, 회갑연, 칠순잔치 등이 이 식당에서 많이 열렸다.
    지역 화교경제의 중심이던 포목상이 1930년대 들어 쇠퇴하자 지역 화교경제는 중화요리음식점이 포목상을 대체했다. 1942년 대구중화상회(현 대구화교협회) 임원 37명 가운데 음식점 경영자는 28명으로 전체의 70% 이상을 차지했다. 당시 대구의 중화요리음식점은 26개소에 달했다.
    광복 직후 대구부와 인근 달성군의 화교 경영 중화요리음식점은 86호로 증가했다. 6·25전쟁 시기는 서울, 인천에서 피란 온 화교가 호떡·만두집을 새로 개업했기 때문에 더욱 증가했다. 1950~60년대 대구지역 화교의 직업별 분포를 보면, 중화요리음식점 종사 호수가 전체 호수의 60%를 차지했다. 1962년 현재 대구·경북의 중화요리점은 303호에 달했다.
    그러나 화교의 중화요리음식점은 서구 외식산업의 유입과 한국인 경영의 중화요리음식점이 증가하면서 1970년대 이후 쇠퇴해 1999년에는 대구 67개, 경북 50개, 2014년에는 대구 50여개, 경북 38개로 크게 감소했다. 화교는 중화요리음식점을 그만두고 미국, 대만 등지로 이민을 떠났으며 이주지에서 다시 중화요리점을 개업하는 이가 많았다.
    화교 경영의 중화요리음식점은 크게 감소했지만 지역 주민의 사랑을 받고 있는 음식점이 적지 않았다. 지역 최대의 중화요리점이었던 군방각은 50년대까지 큰 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60년대 들어 영업이 예전만 못했다고 한다. 기린원(현 덕영대반점)의 탄생과 관계가 있다. 미군정기 한국 최대의 무역회사인 인천 만취동(萬聚東) 출신의 이경문(李慶文)과 구비소가 1958년경 만생양조장을 수창동의 전매청 맞은편에 세워 중국식 백주를 생산했는데, 이곳을 헐고 1960년대 초 2층 건물의 기린원을 세웠다. 기린원은 현대식 시설과 유명한 조리사의 요리기술, 친절한 손님 서비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아이스크림을 무료로 제공하여 큰 인기를 끌었다.
    한일극장 근처에서 해랑으로 출발한 태산만두는 이름그대로 만두 전문집이다. 45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40년의 역사를 가진 영생덕(永生德)은 중화요리뿐 아니라 중국전통의 계란빵, 호떡 등을 맛볼 수 있는 식당이다. 중화반점은 50년 전에 개업해 야키우동의 원조집으로 유명하다. 1971년 개업한 복해반점은 주인이 몇 번 바뀐 뒤 지금은 미국에 재이주한 화교가 다시 돌아와 영업을 하고 있는 식당으로 나이든 화교들이 좋아하는 음식점이다. 이외에도 기린원의 후신인 덕영대반점, 인화반점, 서태후, 만리장성 등도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

     

     

     

     

     

     

     

    대구 여행 만두 맛집 중식 맛집 영생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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