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271. 경북 대구 여행 대구 맛집 국밥 맛집 - 국일따로국밥
    마늘의 국내 맛집탐방 2022. 8. 26. 02:00
    728x90
    반응형

     

     

     

     

    대구 맛집
    국일따로국밥

     

     

    국밥맛집

     

     

     

     

    김치
    부추
    깍두기
    종이컵
    국밥
    국일따로국밥
    국밥
    국밥 맛집
    국일따로국밥
    참소주
    소주
    소주
    국일따로국밥

     

     

     

     

     

     

     

     

    1946년 개점. 원조국일따로국밥. 대구를 대표하는 따로국밥 맛집이다.  따로국밥의 원조라는 국일따로국밥(중구 전동 7-1) 주인 최영자(崔英子ㆍ65)씨가 자부심을 가지고 70년 가까이 장사를 해 온 곳이다. 최씨가 시부모(서도술ㆍ김이순)의 뒤를 이어 장사를 한지도 어느덧 40년세월이 흘렀다. 국일따로국밥은 광복 이듬해인 46년 최씨의 시부모가 창업한 곳이다. 지금은 헐린, 한일극장 부근이었다. 그 무렵 인가가 드물었던 중앙 사거리에는 이른 새벽 나무시장이 섰다고 한다. 땔나무를 팔고 사러 오는 사람들로 붐볐다고 한다. 최씨의 시아버지도 나무를 해다 팔았다고 한다. 장터가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던 터라 시어머니는 지아비를 위해장터로 국밥을 말아 날랐는데, 없는 살림에도 베풀기를 좋아했던 시아버지는주위에서 부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는 나무꾼들을 불러 국물 한 모금씩을 권했다고 한다. 이렇게 나눔이 이어지다 보니 주위에서는 음식장사를 권했고, 그렇게 시작 된 음식장사는 차츰 입소문을 타고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만해도고기를 사면 도축장에선 선지와 뼈는 덤으로 거저 주었기 때문에 음식점을 내는데 큰 돈이 필요 없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국에 밥을 말아 팔았지만 나이든 어른들이 올 경우 예의에 어긋날까 봐 국과 밥을 따로 내놓았고 그런 상차림을 좋아하는 손님이 차츰 많아 졌다고 한다. 그래서 국밥이 따로국밥이라는 이름으로 진화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국일(國一)이라는 상호는 시아버지가 지었다고 한다. 비록 값은 싸더라도 우리나라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을 만들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지어졌다고 한다.


     “하도 오랜 세월 국밥을 끓였더니 요즘은 그리 자주 먹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아이들은 하루 세끼를 다 국밥으로 해결하는 날이 많거든요. 내 자식들이그렇게 좋아하는 음식인데 어떻게 소홀하게 만들 수 있겠습니까.”


    여행사를 운영하면서 어머니를 거들고 있는 경덕씨는 가업계승을 겨냥한 준비를 차근차근 해왔다고 한다. 대학원에서 관광경영학, 그 것도 외식경영을 전공하고 있는 이유도 준비작업의 하나라고 한다. 또한 외국여행 때마다 역사가 오래된 음식점을 빼놓지 않는다고 한다. 특히 일본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한다. 부자가 함께 손님을 맞으며 아버지가 아들에게 손님접대 예절과 요리법등을 가르쳐주는 모습을 보고 가업계승과 전통의 중요성을 절감했다고 한다. 




    그리고, 여기저기에서 찾아본 국밥의 역사

     18세기 중반, 한반도에도 패스트푸드가 번져나가기 시작합니다.
    상공업의 발달로 전국에 5일장이 1천여 개가 생겨나고 보부상과 장꾼들이 등짐과 봇짐을 지고 시장으로, 시장으로 몰려듭니다.시장에서는 이미 그 전부터 객줏집과 주막에서 이미 선보인 음식이 빠른속도록 팔리기 시작했는데 그 것이 국밥입니다. 찬밥을 뚝배기에 넣어 적당한 온도를 유지하면서도 빠르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습니다.국밥의 기록은 중국 문헌에서 처음 발견할 수 있지만, 민족의 음식으로 자리 잡은 건 한반도에서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국밥이 패스트푸드가 되려면 꼭 살펴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온도입니다.본래 국밥이라는 음식의 역사 자체가 끼니를 때우기 위해 빨리 먹는 음식이기 때문에 미지근한 국물의 온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항간에는 음식을 빨리 먹고 나가게 해서 테이블 순환율을 높이게 하려는 의도라고도 하는데 실제 국밥이라는 음식자체가 그렇기 때문에 그 부분에서는 문제가 될 것은 없어 보입니다. 대구식 육개장의 명소 ‘국일따로국밥’의 3대째 주인인 서경수 씨의 증언이 이 국밥의 역사를 말해줍니다.
    “원래 할아버지 세대에 이 식당이 생긴 건 장작 도매상 같은 데서 유래한다고 합니다. 장작을 지고 온 일꾼들 먹이려고 상을 펴고 조금씩 탕을 끓이다가 그게 소문이 나서 결국 식당을 벌이게 된 셈이지요.”
    일꾼들이 빠르게 한끼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국에 밥을 바로 말아서 주어야 했다고 합니다. 이후에 여유 있어진 사람들이 밥과 국을 따로 달라고 해서 ‘따로국밥’이 되었던 것이고 보통 민중들은 빨리 먹고 일어설 수 있는 국밥이 일하기에는 더 좋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국일따로국밥의 65년 역사는 원래는 따로국밥이 아니고, 그저 국밥이었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현재의 국밥이 이렇게 발전한 것에 대해서는 국일국밥의 현재 대표 서경수 씨의 설명이 도움이 됩니다. 
    “옛날에 보온밥솥이 있었겠습니까. 한꺼번에 밥을 하면 다 퍼두고 그때그때 내야 하는데, 밥이 식어 버리니 토렴을 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겠지요.”
    토렴은 민족의 독자적인 기술입니다.
    보온밥솥이 없었던 시절, 아침에 해둔 밥은 식게 마련이었는데, 이것을 그대로 국에 넣어 말면 전체적으로 국물이 미지근해지고 맛이 떨어집니다. 이때 찬밥에 뜨거운 국물을 여러 번 부었다 헹궈내기를 반복하면 밥알 속까지 따뜻해지면서 국밥의 온도가 먹기 적당하게 변하는 것입니다. 토렴에는 또 다른 맛의 비결이 숨어 있다고 합니다.  뜨거운 밥을 그대로 말면, 전분이 녹아서 국물이 탁해져서 맛을 버리게 된다고 합니다. 오히려 밥이 적당히 식어서 단단해진 다음 토렴하면 온도도 맞고, 밥 알갱이의 씹히는 맛도 살아 있는 최상의 상태가 된다고 합니다. 청계천 아바이 순댓국집에 가면 거의 ‘예술적인’ 토렴을 구경할 수 있다고 합니다. 아직 가보지는 못했습니다. 다음에 도전해 보기로 합니다. 국에 밥을 마는 것은 한국에서 유독 발달한 요리법이지만, 서양에서도 유사한 경우를 찾을 수 있다고 합니다.밥이 아니라 빵을 국(스프)에 만다는 것입니다.
    이것 또한 한국처럼 서민의 음식이라는 점은 재미있는 부분입니다.  대구에서 따로국밥이 생겨난 이유를 유추하는 것 중의 하나는 양반들이 평민처럼 국에 밥을 말아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유럽의 역사에서도 비슷하다고 합니다. 



    *서울 국밥집, 육개장의 역사


    우리나라는 불교를 숭상했던 고려시대를 지나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육식이 일반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조선은 유교 국가이므로 중국의 <예기>에 따라 제사를 지내야 했는데, 제사에는 희생물이 필요했습니다. 보통 희생양은 그 이름처럼 양이 많이 쓰였지만 한반도는 양의 서식지로 적합하지 않았고 그래서 선택된 것이 소입니다.  박제가가 <북학의>에서 “조선에서는 하루에 소가 500마리 도살된다”고 쓸 정도로 조선시대에는 소를 많이 잡았습니다. 소를 워낙 좋아해서 임금이 신하들을 데리고 소고기를 구워 먹는 행사를 가졌던 기록도 여럿 있다고 합니다. 해방 후에도 소고기는 이 땅에서 최고 인기 육류로 자리 잡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맘껏 소고기를 먹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른바 역축(役畜)으로 농사에 요긴한 짐승이었던 까닭이어서 였는데, 그러나 이도 경운기의 보급으로 쓸모가 줄어들면서 쇠고기의 대중화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육개장 이야기

     육개장은 개장국 (개고기를 재료로 끓인 장국) 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개장국은 원래 안동에서는 시작되었습니다. 안동 장씨 할머니가 쓴 <음식디미방>에도 개고기 손질법이 자세히 나온다고 합니다. 하지만 개고기에 대한 호불호는 선명했고 그 것은 그 시절에도 개고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있었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시장의 밥집'들은 개고기 대신 마침 생산이 늘어난 쇠고기를 선택했다고 합니다. '중국인의 고기'는 돼지고기고 '한국인의 고기'는 쇠고기라고 합니다.
    조선시대 내내 쇠고기는 금육(禁肉)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쇠고기에 대한 열망 역시 끊임없었고 양반들이나 더러는 왕족들까지 몰래 소를 도살하고 먹었다고 합니다. 서슬이 시퍼렇던 조선초기에도 불법적으로 소를 도살하고 또 먹었다고 합니다. 왕조가 무너지고 그나마 편하게 고기를 먹는 세상이 되었고, 사람들은 개 대신 소를 선택했습니다. 쇠고기는 개고기보다 우위에 있었고 결국 '쇠고기로 끓인 개장국 같은 음식'이 육개장이 되었다고 합니다. 대구 지방의 오래된 따로국밥 집이 대략 70∼80년 정도의 업력을 지니고 있는 것은 이들이 대체적으로 1930∼40년대에 시장 통에서 문을 열었음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육개장의 도시' 대구는 현재 '육개장'의 이름을 두고 고민하고 있는데, '육개장'으로 할까, 아니면 '따로국밥' 아니면 차라리 도시의 이름을 따서 '대구탕(大邱湯)'으로 할까 라고 합니다. '따로국밥'이란 명칭에 대한 이론도 분분합니다.
     대구 영남일보의 음식전문기자 이춘호씨를 비롯해 상당수의 사람들은 '밥 따로 국 따로 주었기 때문에' 따로국밥이라고 한다고 주장한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국과 밥을 한 그릇에 말아서 먹는데 차마 노인들이나 양반 벼슬아치들에게 국에 밥을 말아서 내놓을 수 없어서 밥과 국을 따로 내놓았고 그래서 '밥 따로, 국 따로' 준다는 의미에서 따로국밥이라고 했다는 주장이라고 합니다. 일견 그렇듯 해보이지만, 허점은 있습니다. 오랫동안 밥과 국을 한 그릇에 같이 주면서도 따로국밥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다른 지역에서도 국과 밥을 따로 주면서 따로국밥이라고 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다른 의견은 '국 받는 줄 따로, 밥 받는 줄 따로'여서 따로국밥이라고 주장합니다. 1960∼70년대의 시골에서는 그릇이 귀했습니다. 잔치라도 할라치면 제일 먼저 할 일이 그릇을 모으는 일이었고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곳에서는 누구나 그릇을 많이 가질 수 없었다고 합니다. 큰 그릇에 김치 등 반찬을 담아 내놓고, 개개인은 그저 밥그릇이나 국 그릇 하나 정도만 가질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 그릇에 밥과 국을 같이 담아야 했고 사람이 많이 모이면 밥 퍼주는 줄이 따로 있고 국 퍼주는 줄이 따로 있었다고 합니다. 밥이나 국 중 먼저 받을 수 있는 곳에 줄을 서서 '배급을 받고' 잽싸게 옆줄에 서서 나머지 하나를 받아야 했습니다. 말하자면 '국 줄 따로, 밥줄 따로'이고 그래서 따로국밥이라는 '설'입니다. 대구탕, 따로국밥, 육개장은 각각 그 이름의 유래는 모두 다르지만. 그러나 음식은 비슷하거나 같은 것입니다. 따로국밥 집에 가서 육개장이라고 하거나 "대구 사람들이 즐겨 먹으니 대구탕이네"라고 해도 아무도 시비 걸지 않습니다. 얼마전 포스팅 한 안동 '옥야식당'은 지금도 시장 통에서 국밥을 팔고 있다.




     

     

     

    경북 대구 여행 대구 맛집 국밥 맛집 - 국일따로국밥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