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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50. 노포맛집 진주맛집 비빔밥맛집 - 천황식당
    HELLOMATZIP (헬로맛집) 2022. 7. 12.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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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주맛집 진주비빔밥맛집 진주여행하며 들려볼만한 노포맛집 천황식당은 1927년 개점한 맛집이다. 약 100년 가까이 전주 비빔밥을 계승해 오고 있는 곳이다. 100 여평의 목조 와가와 오래된 비품들도 특징인 곳이다. 진주 비빔밥 맛집 천황식당은 진주 도성 내 나무시장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른 새벽, 진주 도성으로 땔감을 지고 들어오는 사람들을 위해서 나무 시장 부근에 음식점을 열었다고 한다. 이 것이 진주 비빔밥 맛집 천황식당의 시작이었다고 한다. 진주 비빔밥 맛집 천황식당은 여전히 장을 직접 담그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가게 뒤편 마당 장독대에는 장독들이 수북하다고 한다.

    진주비빔밥의 역사가 궁금해져 여러 기사를 찾아보면,
    한반도에는 별별 비빔밥이 산재해 있다. 진주비빔밥, 전주비빔밥, 익산의 황등육회비빔밥, 안동헛제삿밥, 거제의 멍게비빔밥, 문경의 산채비빔밥, 달성군의 사찰비빔밥, 콩잎 대신 팥잎을 사용했던 청도의 횟집나물비빔밥, 그리고 북한의 경우 특이하게 밥을 볶아서 만드는 해주비빔밥 등도 있다고 한다. 고종 3년(1896) 진주가 경남도청 소재지가 됐을 때 관찰사가 가장 즐기는 음식 중 하나가 진주비빔밥이란 기록도 있다고 한다. 1929년 ‘별건곤’이란 잡지에도 진주비빔밥이 소개되었다.육당 최남선은 1936년 매일신보에 연재한 ‘조선상식문답’을 통해 진주비빔밥을 거론했다고 한다. 그는 “전주는 콩나물, 진주는 비빔밥으로 유명하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만 해도 전주는 비빔밥의 고장이 아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현재 한국에서 비빔밥으로 잘 알려진 도시는 전주가 아니다. 현재 전주의 최고 비빔밥 전문점은 ‘한국집’. 68년 영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한국관, 성미당, 가족회관, 갑기회관, 고궁 등이 뒤를 잇는다고 한다. 이 중 전주비빔밥 명인은 가족회관 여사장인 김연임씨라고 한다. 한국 비빔밥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는 진주이다. 진주 대안동 중앙시장 내 ‘천황(天凰)식당’과 울산시 남구 신정동의 ‘함양집’은 전주비빔밥보다 더 역사가 오래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장사를 시작했고 다들 3~4대를 이어 온 집이다. 오래 전 진주시청 옆에 있던 ‘설야’는 진주를 찾은 명사가 많이 왔고 천황·제일식당 이상의 인기를 누렸지만 지금은 사라지고 없어진 집이다. 이 중 천황식당은 1927년부터 장사를 시작 했다고 한다. 영업신고증엔 65년부터 영업 시작을 한 곳이다. 예전 이름은 ‘대방네’였다고 한다. 대방네는 주인 김정희씨의 시할머니인 고(故) 강문숙 할머니의 별명이라고 한다. 근처 전통시장에서 땔감 팔던 인부들이 시장이 파할 무렵이면 강씨 할머니 집으로 찾아왔고 그렇게 인부들의 밥을 차려주다 결국 가게를 차리고 백반정식을 팔기 시작했고 나중에 비빔밥을 특화시켰다고 한다. 6·25전쟁 때도 군인들을 상대로 비빔밥을 팔아왔다고 한다. 이후 시할아버지는 책을 뒤져 식당이름을 ‘천황식당’이라고 바꾸었다고 한다. 그 후 며느리 오봉순 할머니가 가게를 물려받았고, 3대 며느리인 김정희씨가 다시 물려받아 30여년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진주맛집 진주비빔밥맛집 진주여행하며 들려볼만한 노포맛집 천황 근처에 있는 제일식당을 가장 먼저 시작한 사람은 현재 대구FC 대표이사인 조광래의 어머니라고 한다. 그 어머니는 초창기 시래기해장국과 함께 비빔밥도 팔아왔다고 한다. 조 대표의 이모에게 가업이 이어져왔는데 특히 이 집 해장국을 좋아한 사람은 전두환 이었다고 한다. 진주비빔밥도 나름 파벌이 있다. 방송에 너무 많이 노출된 천황식당과 천수식당은 관광객의 필수 방문 코스고, 이 중 천황식당은 반세기 전 한옥 스타일, 퇴락미가 있어서 사진찍기에 좋다고 한다. 하지만 토박이들은 제일식당과 현재 진주칠보화반비빔밥 협동조합 이사장인 윤우근이 경영하는 경남문화예술회관 옆 ‘천년의비빔밥’을 주로 찾는다고 한다. 이 세곳의 차이를 보면 천황, 제일, 천수식당은 놋그릇 대신 스테인리스스틸 그릇, 다들 고명 위에 고추장을 넉넉하게 올려놓는다고 한다. 이 중 천년의비빔밥만 놋그릇을 사용하고 고추장 소스를 자제한다고 한다. 진주발 교방한정식의 전통을 제대로 이어받은 건 천년의비빔밥 이라고 한다. 반찬에는 나물 가짓수도 중요한데 보통 7~9가지가 섞여 나온다고 한다. 2013년 진주비빔밥명인이 된 정계임씨(61)는 국립경상대학원 생물소재 공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녀는 진주비빔밥과 진주교방한정식의 상관관계를 문헌학적으로 파고들고 있다. 정계임씨는 50여 가지의 퓨전비빔밥도 개발했다. 이를 위해 진주문화연구소 남성진 소장과 협업시스템을 마련했다고 한다. 그녀는 89년 경남 첫 요리학원인 ‘일신요리학원’을 차리고 99년부터 2003년까지 진주음식을 한상차림으로 선보이는 한정식 ‘수라’까지 운영해왔다. 수라는 진주관아의 연회식이었던 진주교방한정식을 조심스럽게 공개했다. 논란도 많았지만 현재 이 음식은 그의 제자가 운영하는 ‘아리랑한정식’으로 전해지고 있다. 현재도 진주교방한정식의 기본적인 틀은 계속 리모델링 중이라고 한다. 혹자는 진주비빔밥이 진주성 전투에서 시작되었다는 주장도 하고 있다.

    “진주성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막바지. 성 안에 있던 사람들이 마지막 전투를 앞두고 밥을 짓고, 나물반찬을 마련하고 소를 도축했다. 그릇에 밥, 나물 등을 담고 고기를 얹은 것이 바로 진주비빔밥의 시작이다.” 
    추측이고 근거도 없는 이야기라고 한다. 그나마 기록으로 남은 것은 대부분 일제강점기의 서적들이라고 한다. 민족주의적인 시각에서 진주성 전투를 이야기했고 진주비빔밥을 이야기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랬으면 좋겠다”와 “그러지 않았을까?”가 발전한 이야기일 뿐이라고 한다. 진주성 전투는 임진왜란 당시 가장 큰 전투 중 하나였다. 제1차 진주성전투는 1592년 10월5일부터 10일 사이에 있었고 이 전투는 임진왜란 3대첩 중 하나이다. 우리 측이 김시민 목사를 중심으로 군ㆍ관ㆍ민이 집결하여 승리한 전투이고  왜군 3만 명 중 2만 명 이상이 죽은 전투이다. ‘진주비빔밥이 나타났다’는 시기는 2차 전투이다. 2차 전투는 이듬해인 1593년 6월 19부터 29일 사이에 있었고 그야말로 혈투였다. 황진, 최경회, 김천일 장군들이 분전했지만 전투 중 황진 장군이 죽었다. 여름철이어서 비가 많이 왔고 그 와중에 서쪽의 흙 성벽이 무너졌고 황진 장군은 성벽 쌓는 이들을 독려 차 서문 쪽에 갔다가 왜군 저격병의 총탄에 맞아 숨진 전투이다. 2차 진주성 전투의 분기점이 되었고 2차 전투를 지휘했던 지휘부 중 한 축이 무너지고 성도 곧 무너졌다. 진주성은 지금과는 달리 군데군데 흙으로 쌓은 성이었다. 왜군은 5만 명이었고 성안의 사람들은 민간인을 합쳐서 6만 명이었다. 조선 측은 군인이 아니라 민간인이 훨씬 많았고, 전투를 시작하면 모든 일손들이 모두 필요했다. 흙을 날라야 하고 각종 병기들도 옮겨야 했으므로 밥을 해먹을 틈도 없고 그만큼 곡물도 귀했을 것이다. 진주성의 경우 그 전해인 1592년 가을은 전쟁시기여서 원래 곡물이 귀한 판에 더더욱 곡물이 귀했을 것이고 쌀은 당연히 더 귀했을 것이기 때문에 군수품이 부족한데 비빔밥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했을 겄이다. 음력 6월이면 나물은 흔할 수 있으나 들판의 나물이 흔하다는 것이지 좁은 진주성에 나물이 흔했을 리는 없을 것이고 게다가 진주성 안에 6만 명이 있었다면 나물이든 곡물이든 남질 않았을 것이다. 소의 도축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이 바쁜 와중에, 도구도 없고 소 도축은 힘든데다가 성은 늘 물 부족으로 힘들었다. 당시의 방식으로 몇 만 명이 먹는 쇠고기를 생산하는 것은 시간, 도구가 모두 부족해 힘들었을 것이다. 적은 수시로 몰려오고, 장마철의 성벽이 무너지는 판에 밥 짓고, 나물 만들고, 소를 잡는다는 이야기는 거의 불가능한 이야기일 것이다. 그래서 다른 방면으로 나오는 이야기는 기생들이 비빔밥을 만들었다는 설이다. 진주성 전투에서는 논개라는 특이한 인물이 등장하는데 더불어 등장하는 이야기가 있다. 바로 ‘진주 기방(妓房)에서 비빔밥이 발전되었다’는 이야기다. 이 역시 엉터리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기방, 기생제도는 일제강점기에 생긴 것이다. 이른바 권번인데 이 것은 일제강점기에 있었던 기생들의 조합이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이전에는 기생들의 조합이 없었다고 한다. 기생들은 천민계급으로 지방관청에 소속되어 평소에는 허드렛일을 하다가 지방관청의 크고 작은 행사에 불려나가서 춤, 노래, 웃음을 팔았던 이들이었다고 한다. 갑오경장(1894년)으로 신분제도는 무너졌고 신분이 직업이 되어서 신분상 천민이었던 기생들은 직업 기생이 되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기생방, 권번에서 비빔밥을 먹었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긴 하다고 한다. 그러나 그 이전 조선시대에 기방에서 비빔밥을 먹었다는 것은 엉터리이다. 진주 중앙시장 무렵의 ‘천황식당’은 업력 약100년을 넘겼다. 이때는 일제강점기 초기다. 길거리 음식점에서 이미 비빔밥을 팔았는데 일제강점기 기방에서 비빔밥이 시작되었다는 아귀가 맞지 않는 것이다. 그 이전에 민간에서 먹었을 것이라는 추측까지 더하면 기방에서 비빔밥이 시작, 발전되었다는 말 역시 엉터리라고 볼 수 이다. 일제강점기 이전에도 기생조직이 있긴 했습니다만 그러나 역시 천민의 신분을 벗어나긴 힘들었다고 힌다. 비빔밥은 삼남의 중심 진주의 음식이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북에는 평양>, <남에는 진주>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로 진주는 전통적으로 남쪽에서 가장 큰 도시였습니다. 
    진주에는 관찰사, 목사 같은 문관들과 병권을 쥔 절도사가 무시로 상주하거나 드나들었던 큰 도시였고  관리들이 많으면 상인들이 모여든다. 시장이 서고 물산의 교류도 활발했다고 한다. 평양, 해주, 의주, 개성 등은 조선의 대 중국 통로에 있는 도시였고 관리들이 많이 드나들지만 현지의 사대부가 많지는 않았다고 한다. 본관을 진주로 둔 성씨들도 많은데 진주가 큰 도시였고 양반, 사대부들이 많았던 도시였다는 뜻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갑오경장 이전에는 경상, 전라, 충청을 동서로 갈랐다. 한양에서 바라볼 때, 낙동강을 중심으로 왼쪽은 경상좌도, 오른쪽은 경상우도 였다. 진주는 경상우도의 중심이자 삼남(三南)의 중심지였고 왜군들이 진주성 전투에 매달린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동래, 경남 해안 지역으로 상륙한 왜군은 진주를 거쳐야 지리산을 지나 호남평야로 진입, 군량을 구할 수 있었고 진주는 정신적인 요충지로 진주 함락은 조선의 반 이상, 삼남을 얻는 것이었다. 이 것이 크고 발달한 도시 진주에서 비빔밥이 시작한 까닭이라고 한다. 진주 관청에 많은 물산들이 몰려들고 더불어 소비자들도 풍부하다. 관리, 상인, 일반 서민 등 모두 소비자였고 소, 돼지 등 짐승의 도축도 마찬가지 였다. 짐승의 도축은 엄격히 통제되었는데 가장 큰 소비자 층은 바로 지방 관청이었다고 한다. 백정들은 지방 관청에 호적을 올리고 세금 대신 소, 돼지 등을 도축해서 납품했다고 한다. 쇠고기가 사용되었다는 것은 진주가 당시로서는 상당히 큰 도시였음을 보여주는데 1920년대 시작되어 1930년대 후반까지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형평사’ 운동도 바로 진주에서 비롯되었다. 형평사, 형평운동은 진주의 백정들이 시작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던 ‘진주 백정들의 사회주의 평등’ 운동, 단체였다. 헛제사밥의 등장도 마찬가지다고 한다. 양반, 사대부들이 제사를 모시는데 제사 음식은 최고의 음식으로 한다. 이유는 조상들에게 바치는 음식이기 때문이다. 제사음식을 평소에 해먹었던 것이 바로 헛제사밥인데 진주의 헛제사밥도 진주비빔밥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한다. 1920년대 외식이 본격화할 무렵 비빔밥은 대표 외식 품목이었다고 한다. 당시 서울에도 비빔밥이 흔했는데 진주비빔밥이 특히 유명했다. 29년 12월 1일자 잡지 ‘별건곤’에는 진주 비봉산을 내세운 비봉산인이란 사람이 쓴 비빔밥에 관한 기사가 등장한다. 당시 진주비빔밥 예찬 기사에 등장한 비빔밥과 지금 ‘천황식당’ 비빔밥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한다. ‘하얀 쌀밥 위에 색을 조화시켜 나를 듯한 새파란 야채 옆에는 고사리나물 또 옆에는 노르스름한 숙주나물 이러한 방법으로 가지각색 나물을 둘러놓은 다음에 고기를 잘게 이겨 끓인 장국을 부어 비비기에 적당할 만큼 그 위에는 유리 조각 같은 황청포 서너 사슬을 놓은 다음 옆에 육회를 곱게 썰어놓고 입맛이 깩금한 고추장을 조금 얹습니다. 여기에 일어나는 향취는 사람의 코를 찌를 뿐 아니라 보기에 먹음직합니다. 값도 단돈 10전. 상하계급을 물론하고 쉽게 배고픔을 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소담하고 비위에 맞는 비빔밥으로 길러진 진주 젊은이들은 미술의 재질이 많은 것입니다. 또한 의기의 열렬한 정신을 길러주는 것입니다.’(‘별건곤’ 기사 중에서) 
    여기까지는 황광해 음식칼럼니스트 님의 글을 참고해봤다.


     진주맛집 진주비빔밥맛집 진주여행하며 들려볼만한 노포맛집 천황식당의 역사는 현재 진주 중앙시장 자리에 땔감, 장작 시장이 있었는데 이른 아침, 장작을 지게에 지고 온 사람들의 식사거리로 시작이 되었다는 것이다. 천황식당의 주인은 3대째다. 처음 문을 연 강문숙 할머니, 2대 오봉순 할머니는 모두 돌아가셨다. 두 분은 김정희 대표의 시할머니, 시어머니다. 김정희 대표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2년간 그리고 혼자서 25년간 가게를 이끌어왔다고 한다. 식사를 주문하면 진주 비빔밥 맛집 천황식당의 비빔밥의 속대기가 보인다. 진주비빔밥에는 속대기가 반드시 들어간다. 속대기는 김, 파래 등과 비슷한, 깊은 바닷물 속에서 자라는 해조류다. 삶거나 데친 고사리, 무채, 숙주나물 같은 나물과 쏙대기(돌김) 무침이 밥알보다 조금 길게 잘려 있고 그 위를 붉은 육회와 ‘엿꼬장’이라 부르는 독특한 고추장이 있다. 이 장은 마른 홍합을 끓여 만들고 전통적인 조선간장으로 간을 하고, 된장, 고추장 등도 ‘천황식당’에서 만든 것들을 사용해 만든다. 재료를 다져 넣어 들어가 비벼 먹기에 좋다. 이 곳의 나물은 삶아서 꼭 짠 다음 나물을 무쳐낸다. 나물에 장이 배어들면 나물 맛이 한결 돋보인다. 국으로는 선지가 들어간 보탕국이 나온다. 맑은 선짓국이다.
    이 곳에는 마늘의 헬로맛집 스티커가 붙어있다.한국맛집 2,000 곳 이상, 해외맛집 1,000곳 이상 다니면서 내가 헬로맛집 스티커를 붙인 곳은 해외에 100여곳 이상, 한국에 50곳 내외이다. hellomatzip 은 단순하다. 협찬은 일절 받지않고 내 주머니에서 나온 돈으로 음식을 먹는다. 내 입맛에 무척 맞는다면 사장님과 셰프님에게 프로젝트를 설명하고 함께 스티커를 붙이면 끝.  자, 그럼 다시, 헬로맛집 프로젝트란 무엇인가? Hellomatzip.  Matzip 맛집 이라는  한글을 전세계 사람들이 김치를 kimchi 라 하듯 모두가 맛집 , (사실은 맛칩일수도... )으로 말할 그 날을 위해 진행하고있는 프로젝트이다. 그렇다면 이 것으로 난 무얼 얻는가. 재미와 성취감. 그 것으로 끝이다.



     

     

     

     

     


     진주맛집 진주비빔밥맛집 진주여행하며 들려볼만한 노포맛집 천황식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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